[ DATA ARCHIVE ]
Category: Artist / Ukiyo-e (우키요에)
Subject: Tsukioka Yoshitoshi (月岡芳年, 1839-1892)
Index: #04
Status: Record Initialized
수백 년간 일본의 무사 그림을 지배해온 불문율이 있었다.
사무라이들은 화살을 맞아도 비장해야 했고, 배를 갈라도 영웅적이어야 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영웅’이라는 판타지였으니까.
그러나 1868년 여름, 우에노의 전쟁터를 목격한 츠키오카 요시토시는 그 영웅적 서사시를 배신했다.
그의 눈에 비친 전장은 영웅들의 무대가 아닌, 파리 떼가 들끓고 피가 흘러넘치는 시신들의 무덤일 뿐이었다.
오늘 소개할 「괴해백선상(魁題百撰相)」은 전장을 실제로 보고 느낀 요시토시의 시선을 담아내고 있다.
영웅이 죽고 야만이 시작된 시대를 살았던 요시토시,
그가 마주한 지옥의 실체는 무엇이었는지 함께 알아보자.

#9
1868년 우에노 전쟁
우에노 전쟁의 배경과 전개
1853년 ‘검은 배’의 등장
수백 년간 교류의 문을 닫고 살던 일본에 미국의 거대한 군함(흑선)이 나타났었다.
그 당시 집권세력이던 막부(쇼군이 중심인 세력)가 이 위협에 무능하게 대처하자,
지방의 강력한 가문(사쓰마, 조슈 등)들은 “천황을 모시고 서양을 몰아내자”며 천황을 앞세워 반기를 들었다.
1868년 항복한 쇼군과 버려진 사무라이들
치열한 권력 다툼 끝에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항복을 선언, 에도 성을 신정부군에게 넘겨주었다.
성은 평화롭게 넘어갔지만, 졸지에 실업자가 된 수만 명의 막부 측 사무라이들은
주군의 비굴한 항복과 자신들의 상실된 지위에 분노하며 에도로 집결했다.
우에노 산의 요새화와 ‘쇼기타이(彰義隊)’
쇼기타이는 막부측 사무라이들이 결성한 집단이었다.
이들은 에도 성 인근의 우에노 산(칸에이지 절)에 요새를 구축했다.
쇼기타이들은 은거 중인 쇼군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신정부군을 인정하지 않으며, 에도 시내에서 무력 시위와 보복 살인을 벌여 신정부의 치안을 위협했다.
1868년 7월 4일 단 하루의 학살과 무너진 시대
신정부군(천황세력)은 결국 에도의 불안 요소인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토벌을 결정했다.
전쟁 당일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신정부군은 최신식 무기들로 우에노 산을 포격했다.
구시대의 칼과 창을 든 그들은 근대의 대포 앞에 무력했다.
우에노 산은 불바다가 되었고, 쇼기타이는 하루 만에 궤멸하며 에도 막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전투를 넘어 ‘중세(칼의 시대)’가 ‘근대(총포의 시대)’에 의해 강제로 종료된 사건이다.
요시토시는 바로 이 현장에서 수백 년을 지탱해온 무사 계급의 신화가
물리적으로 해체되는 참상을 목격했다.

당시 하급 무사들이 먹고살기 위해 칼 대신 우산 살을 깎던 모습.
에도 시민들이 ‘고쿠츠부시’라고 비웃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다.
우에노 전쟁을 바라보는 에도 시민들의 시선
당시 에도 시민들은 사무라이에게 낭만적인 모습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사무라이는 조롱의 대상이자 단순한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고쿠츠부시(穀潰し)’
에도 말기 시민들에게 사무라이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그들을 ‘곡식을 축내는 자’라는 뜻의 ‘고쿠츠부시(穀潰し, 밥벌레/녹봉 도둑)’라 부르며 경멸했다.
수백 년간 전쟁을 겪지 않아 관료화된 사무라이들은 무사로서의 본분을 잊은 상태였다.
시민들은 “세금으로 녹봉을 받으면서도 정작 흑선이 왔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망친 겁쟁이들”이라며 그들을 비난했다.
우에노에 주둔한 쇼기타이에 대한 여론도 최악이었다.
그들은 “주군을 수호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상은 상점을 약탈하고 행패를 부리는 무뢰한과 다를 바 없었다.
시민들에게 쇼기타이는 의로운 군대가 아닌, 치안을 위협하는 골칫거리로 인식되었다.
우에노 전쟁 당일의 풍경은 비현실적이었다.
에도 시민들은 공포에 떨기보다 이를 일종의 유희처럼 즐겼다.
신정부군의 포격으로 우에노 산의 칸에이지(막부의 수호 사찰)가 불타오르자,
시민들은 도시락과 술을 챙겨 인근 언덕이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불길을 구경하자”, “누가 이기는지 보자”며 전쟁을 관람했다.
이는 당시 시민들이 이 전쟁을 자신의 일이 아닌, 지배 계급 간의 권력 다툼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전쟁이 하루 만에 종료되자 시민들의 냉소는 더욱 깊어졌다.
그들은 “천하무적이라던 쇼기타이도 대포 앞에서는 무력했다”며,
300년을 이어온 막부 체제가 단 하루 만에 무너진 상황을 허무하게 받아들였다.
우에노 전쟁을 바라보는 요시토시의 시선
요시토시는 문필가가 아니었기에 공식적인 기록은 드물다.
대신 제자들의 회고록과 작품집 「괴해백선상(魁題百撰相)」의 서문을 통해
그가 전쟁을 대했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제자 야마나카 코도(山中古洞)의 증언 “시체 냄새 속의 스케치”
요시토시의 제자 야마나카 코도는 스승의 기이한 행동을 증언했다.
요시토시는 전쟁 직후 제자인 이노우에 탄케이(井上探景)를 데리고
우에노 산노다이(칸에이지에서 에도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올랐다.
그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현장에서 쓰러진 병사들의 시신을 있는 그대로 스케치했으며,
이는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죽음의 형태를 기록하려는 집착이었다.
요시토시의 회고: “그것은 진짜였다”
훗날 요시토시는 당시의 경험에 대해
“가부키의 가짜 피가 아닌, 진짜 인간의 피와 죽음을 보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우에노 전쟁터에서 직접 목격한 것은 영웅적인 최후가 아니라,
부패하고 파리 떼가 들끓는 참혹한 육체 덩어리였으며,
이것이 그가 마주한 전쟁의 실체였다.
1868년 당시 요시토시의 개인적 상황
우에노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괴해백선상」을 작업하던 시기,
요시토시가 처했던 현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전쟁 인플레이션과 생존형 다작
1868년은 전쟁으로 인해 에도의 경제가 파탄 나고 물가가 폭등한 시기였다.
츠키오카 가문의 가주인 요시토시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괴해백선상」은 예술적 야심작인 동시에,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해 돈을 벌어야 했던 ‘생계형 프로젝트’였다.
그는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65점에 달하는 고밀도 다색 판화를 제작했는데,
이는 굶주림과 강박이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작업 속도였다.
매절 계약과 저작권 부재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은 저작권 개념의 부재에 있었다.
화가는 판원(출판사)에게 밑그림을 넘길 때 ‘화료’라는 일회성 작업비를 받으면 끝이었다.
작품이 대량으로 판매되어도 추가 수익(인세)은 모두 출판사가 독점했다.
당시 우키요에 한 장의 가격은 국수 두 그릇 정도의 저가였기에 화료 또한 낮았고,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그려야만 했다.
도제 시스템의 부담
당시의 도제(徒弟) 시스템에서 제자는 수업료를 내는 학생이 아니라,
스승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기술을 배우는 식구였다.
제자들이 보조 역할을 수행하긴 했으나,
그들이 독립하기 전까지의 식비와 생활비는 전적으로 스승인 요시토시가 책임져야 했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가문의 위신을 위해 제자들을 부양해야 하는
‘가부장의 경제적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1868년의 요시토시는 이처럼 일회성 화료를 받아 제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쟁 인플레이션 속에서 기계적으로 작품을 생산해야 했다.
그가 전장에서 시체 냄새를 맡으며 집요하게 그림을 그렸던 배경에는 예술적 열망뿐만 아니라,
가장으로서의 절박한 생계 유지가 깔려 있었다.

1868년 우에노 전쟁의 격전지. 붉은 가발(샤구마)을 쓴 신정부군이 근대식 소총을 앞세워 에도 막부의 상징인 우에노 산을 무너뜨리고 있다.
1868년 당시 정치적 상황
에도 시민의 이중적 심리와 신정부의 검열 배경
사무라이 혐오와 막부에 대한 애착의 분리
에도 시민들이 사무라이를 ‘고쿠츠부시(밥벌레)’라고 비하한 것은 무능한 지배 계급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시민들은 260년간 도쿠가와 막부가 유지해온 평화와 그 안에서 꽃피운 ‘에도 문화’에 강한 자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막부의 몰락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자신들의 삶의 양식과 터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다가왔다.
신정부군에 대한 반감: ‘굴러온 시골뜨기’
사쓰마와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군은 에도 시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시민들은 그들을 자신들의 세련된 문화를 파괴하러 온 ‘촌스러운 침략자’로 간주했다.
특히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폭등하고 정국이 불안해지자,
“차라리 막부 시절이 나았다”는 향수가 시민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검열의 핵심 ‘약자에 대한 동정심’ 차단
신정부가 가장 경계한 것은 쇼기타이의 죽음이 막부에 대한 향수에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쇼기타이를 민폐 집단이라 욕하던 시민들도,
그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본능적인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어제의 ‘골칫덩어리’가 오늘의 ‘순교자’로 재정의되는 순간,
신정부는 ‘정의의 사자’가 아닌 ‘잔혹한 학살자’가 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선전의 통제
따라서 신정부는 쇼기타이를 조금이라도 의롭거나 비장하게 묘사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는 시민들이 패배자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는 것을 막고,
신정부의 집권 정통성을 강요하기 위한 정치적 조치였다.
텐포 개혁과의 차이점
과거 텐포 개혁(天保改革)이 사치나 춘화(풍속)를 단속했다면,
1868년의 검열은 동시대의 뉴스를 통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당시 우키요에는 신문의 역할을 수행했기에,
민감한 정치적 사건이나 전쟁 상황을 사실대로 묘사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이는 정보가 통제되지 않고 퍼져나가 민심이 동요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10
「괴해백선상(魁題百撰相)」의 발표
작품명: 「괴해백선상(魁題百撰相)」
제작년도: 1868년 (메이지 1년)
제작 배경: 우에노 전쟁 직후, 요시토시가 제자 아사히사이 토시카게와 함께 전쟁터를 직접 답사한 후 제작.
구성: 총 65점의 시리즈물 (제목은 ‘백선’이나 중간에 중단됨).
작품적 특징
미타테(見立) 기법: 검열을 피하기 위한 위장
이 시리즈의 인물들은 표면적으로 전국시대나 겐페이 전쟁의 유명 장수들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는 메이지 신정부의 엄격한 검열을 피하기 위한 ‘미타테(見立, 빗대어 그리기)’ 기법일 뿐이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리 란마루나 다테 마사무네 등 과거의 장수로 표기되어 있으나,
인물들의 뒤틀린 자세와 고통스러운 표정, 쏟아지는 내장, 옷의 훼손 상태나 상처의 위치는
요시토시가 우에노 전쟁에서 본 ‘쇼기타이 대원들의 시신’ 그대로다.
「괴해백선상」의 서문에는 제작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그는 이 그림들이 단순한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며,
전쟁터에서 산화한 무사들의 혼(魂)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고 밝혔다.
육체는 훼손되었으나 그 기백만은 그림 속에 남기겠다는 의지였다.
존 스티븐슨(John Stevenson)은 이를 두고
“과거의 영웅을 그리는 척했으나,
관객들은 그 안에서 어제 길거리에서 본 이웃의 시체를 알아보았다”고 분석했다.
즉, 「괴해백선상」은 역사화(歷史畵)의 탈을 쓴 종군기자의 기록 ‘르포르타주(현장 보도)’였다.
‘멋’이 제거된 죽음
기존의 무사화(武者畵)에서 무사는 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순간조차 비장하고 아름답게 미화되었다.
그러나 「괴해백선상」은 다르다.
그는 영웅적 서사를 제거하고, 육체가 파괴되는 순간의 고통과 비참함만을 건조하게 묘사했다.
이는 일본 미술사가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잔혹하고도 중요한 리얼리즘의 전환점이다.

서양 동판화의 해칭(Hatching) 기법이 배경 전반에 도입된 도판. 인물의 등 뒤로 깔린 짙은 어둠은 단순한 검은 칠이 아니라 가느다란 빗금들을 수없이 겹쳐 쌓아 만든 ‘입체적 공간’이다. 퀭한 눈과 창백한 피부 묘사는 영웅적 장수가 아닌, 죽음의 공포 앞에 선 한 인간의 처절한 실존을 보여준다.
기법과 묘사 ‘서양의 빛과 병리적 리얼리즘’
목판으로 구현한 동판화(銅版畵) 스타일
요시토시는 전통적인 목판화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표현 방식에서는 서양의 동판화를 모방하여 사실적인 질감과 입체감을 구현했다.
서양 동판화의 주요 특징
선의 미세함 : 딱딱한 금속판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긁거나 산(Acid)으로 부식시켜 선을 만든다.
칼로 나무를 깎는 목판화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가늘고 섬뜩할 정도로 예리한 선이 특징.
해칭을 통한 명암 : 동판화는 면을 칠할 수 없어 가느다란 선을 수없이 겹쳐 그리는 ‘해칭(Hatching)’ 기법을 사용한다.선이 겹칠수록 어두워지는 원리를 이용해 입체감을 만든다.
금속성의 차가운 질감 : 나무의 따뜻한 결이 느껴지는 목판화와 달리, 금속판에서 찍혀 나온 그림은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선(Line)을 이용한 음영: 해칭(Hatching)
전통 우키요에가 색의 농담을 조절하는 ‘보카시(ぼかし, 그라데이션)’ 기법으로 그림자를 표현했다면,
요시토시는 서양 동판화의 ‘해칭(Hatching, 빗금)’ 기법을 도입했다.
그는 붓으로 면을 칠하는 대신, 가늘고 촘촘하게 교차하는 검은 선들을 목판에 새겨 옷의 주름이나 배경의 어둠을 표현했다.
이는 목판화임에도 불구하고 금속 판화의 날카롭고 세밀한 질감을 낸다.
입체적 명암법: 얼굴의 그림자
전통적인 미인화나 무사화에서는 얼굴을 하얗고 평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며,
얼굴에 그림자를 넣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요시토시는 서양의 명암법을 적용하여
광대뼈 아래, 턱 밑, 목의 근육 등에 과감하게 검은색 음영을 넣었다.
이를 통해 인물은 평면적인 종이 그림이 아닌, 골격과 부피를 가진 입체적인 실체로 묘사되었다.
피의 묘사 변화
전작인 「영명이십팔중구(英名二十八衆句)」가 피를 분수처럼 흩뿌리는 연극적 ‘액션’으로 묘사하여 관객의 흥분을 유도했다면,
「괴해백선상」은 피의 물리적 성질에 집중했다.
요시토시는 우에노 전쟁터에서 피가 땅에 떨어져 흙과 섞이고,
옷감에 스며들어 검붉게 산화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또한 칼에 의한 상처뿐만 아니라, 당시 최신 무기인 총에 의한 관통상도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따라서 이 작품의 피는 튀어 오르지 않고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거나 옷을 무겁게 적신다.
독자는 여기서 통쾌함 대신 축 늘어진 시체의 불쾌한 질량감과 참담함을 느끼게 된다.
해부학적 리얼리즘
요시토시는 ‘목의 단면’ 묘사에서 기존 우키요에의 관습을 완전히 파괴했다.
과거 화가들이 잘린 목을 단순히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 원(기호)으로 처리했던 것과 달리,
그는 식도와 기도의 구멍, 경추의 위치, 근육의 결까지 정밀하게 묘사했다.
이는 인간을 존엄한 영웅이 아닌 ‘파괴된 생물학적 기계’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서양인의 골격 실험
서양 인물화의 해부학적 구조를 일본 무사에게 무리하게 대입하는 과도기적 실험이 나타난다.
도판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를 보면, 일본의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콧대가 높고 눈매가 깊은 서양인의 골격을 하고 있다.

잘린 목의 단면을 기호가 아닌 ‘해부학적 실체’로 묘사한 문제작. 식도와 기도의 구멍, 경추의 위치, 찢어진 근육의 결까지 세밀한 해칭(빗금)으로 표현하여 시각적 충격을 극대화했다.
「괴해백선상」에 대한 당대의 평가
평론가들의 극찬 “부패의 냄새가 나는 리얼리즘”
당대 평론가들은 “그림 속 시체에서 썩어가는 냄새까지 그려냈다”는 평가를 남겼다.
이는 비난이 아닌, 요시토시가 구현한 기술적 경이로움에 대한 찬사였다.
그는 기존 우키요에의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화풍을 탈피하고,
서양의 명암법과 해부학을 완벽하게 적용하여 후각이 느껴질 정도의 ‘냉혹한 사실주의’를 완성했다.
대중의 열광 ‘가장 잘 팔린 시각적 종군 리포트’
이 시리즈는 잔혹함 때문에 외면받기는커녕,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흥행했다.
당시 정보에 굶주려 있던 에도 시민들에게 요시토시의 그림은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에노 전쟁의 결말과 창의대(彰義隊)의 전멸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뉴스 특보였다.
신정부의 검열 또한 역설적으로 작품의 판매를 촉진했다.
시민들은 그림 속 인물의 상처와 특징을 보고
“이름은 옛날 장수지만, 사실은 어제 죽은 누구다”라고 속닥거리며 정체를 추리했다.
마치 독재 정권 시절의 은유적 예술처럼, 요시토시의 그림은 검열을 비웃는 공공연한 비밀로서 에도 시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대중은 압도적인 현장감을 소비하기 위해 앞다투어 그림을 구매했다.
「괴해백선상」 요시토시에게 끼친 영향
‘연출’에서 ‘다큐멘터리’로 화풍의 변화
이 작품을 기점으로 요시토시의 그림에서 가부키적 과장은 사라졌다.
전작 「영명이십팔중구」가 관객의 쾌락을 위한 화려한 연극적 연출이었다면,
「괴해백선상」은 감정이 배제된 냉혹한 사실주의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는 영웅의 기개를 그리는 화가에서 인체가 파괴되는 물리적 진실을 기록하는 ‘무참화의 화가’로 정체성을 확립했다.
신경증적 관찰자
보통 사람이라면 전쟁터의 참혹한 시신 앞에서 시선을 돌렸을 것이나,
요시토시는 스케치북을 꺼내 들었다.
그는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 원인을 시각적으로 분석하려는 강박적인 탐구열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러한 기질은 훗날 그를 괴롭히는 신경쇠약의 원인이 되었으나,
동시에 그를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예술가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트라우마의 악화
「괴해백선상」은 목격한 지옥을 예술로 승화하려는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정신을 파괴하는 독이 되었다.
매일 시체를 관찰하고 뇌리에 새겨 그리는 작업은 예민한 신경을 가진 그에게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였다.
내면에 잠재된 불안과 광기는 이 작업을 통해 증폭되었고,
이는 1870년대 초반 그를 덮친 심각한 정신 붕괴의 직접적인 트리거가 되었다.
‘마지막 우키요에 화가’이자 저널리스트
역설적으로 이 작품 덕분에 그는 에도 시대의 끝자락에서 가장 주목받는 화가가 되었다.
대중은 그를 단순한 화공이 아니라 격변하는 시대의 참상을 기록하는 ‘저널리스트’로 인식했다.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는 평가는 그에게 명성을 안겨주었고,
츠키오카 가문의 가주로서 입지를 굳히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괴해백선상(魁題百撰相)」은 일본 미술사에서 가장 잔혹한 문제작이자,
그 시대를 그려낸 다큐멘터리였다.
요시토시는 이 작품을 통해 성공을 거머쥐었으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바로 ‘신경쇠약’이라는 마음의 병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정신을 담보로 그려낸 이 지옥도 덕분에,
무사들의 마지막 모습은 지워진 기억이 아닌 선명한 핏빛으로 살아 숨 쉴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남긴 것은 단순한 전쟁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를 고스란히 담아낸 처절한 저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