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 Tsukioka Yoshitoshi (月岡芳年)] #02 | 츠키오카 요시토시의 생애 1부 (시대의 거울 요시토시, 무기를 장착하다)

[ DATA ARCHIVE ]

Category: Artist / Ukiyo-e (우키요에)

Subject: Tsukioka Yoshitoshi (月岡芳年, 1839-1892)

Index: #02

Status: Record Initialized



예술가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셰익스피어부터 스탕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예술의 본질을 ‘거울’에 비유해 왔다.
거울은 세상을 투영하고, 때로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진실까지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는 츠키오카 요시토시의 삶을 그가 마주했던 격변의 시기와 결부하여 정리할 것이다.

그가 살았던 19세기의 일본은 그 어떤 때보다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이제 우리는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한 예술가가 격동하는 시대의 파도 위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그 파도 자체를 어떻게 자신의 작품 속으로 끌어들였는지 그 지독한 기록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츠키오카요시토시(月岡芳年)
우타가와 쿠니요시 歌川国芳「里すずめねぐらの仮宿」(1846년)(東京富士美術館所蔵)
텐포개혁으로 배우 그림이나 유녀에 관련된 그림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쿠니요시는 배우나 유녀를 동물로 그렸다.
이 우키요에는 모두 참새로 표현되어있다.
#01
1839년 4월 30일(텐포 10년 3월 17일) 탄생

요시토시가 태어난 1839년은 에도의 평화가 끝나가던 시기였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으나 내부에서는 이미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1830년대 텐포 대기근을 겪은 직후였다.
막부는 흔들리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치와 유흥을 극단적으로 탄압하는 ‘텐포 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예술계에도 거센 풍랑을 일으켰는데,
화려한 풍속을 그리던 우키요에 화가들이 줄줄이 체포되고 작품이 압수되는 서슬 퍼런 시기가 이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풍랑 속에서 개인적인 비극 또한 그를 덮쳤다.

에도 신바시의 상가에서 ‘요시오카 효부’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친어머니의 이혼과 계모와의 깊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결국 아버지의 사촌인 약재상 ‘교야(京屋)’ 오리사부로의 양자로 보내진 그는,
가정에서 채우지 못한 정서적 허기를 예술에 대한 집착으로 대신하기 시작했다.

훗날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서늘한 여성들의 눈빛과 신경질적일 만큼 정교한 필선은,
어쩌면 이 시절의 불안했던 기억과 결핍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양부의 가문은 그가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최적의 토양이 되었다.
엄격한 규제가 지배하던 시대였지만,
상인 계급이었던 양부의 집안은 막부의 감시를 피해 숨어서 예술을 탐닉하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요시토시는 규제 너머에 존재하는 ‘금기’의 짜릿함을 체험하며 예술을 세상을 향한 탐닉이자 저항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시대의 억압과 개인의 상처가 만나, 광기 어린 거장으로 성장할 비옥한 그늘이 만들어진 셈이다.


우타가와 쿠니요시 歌川国芳「通俗水滸伝豪傑百八人之一個」에서(좌)「短冥次郎阮小吾」(우)「浪裡白跳張順」 *모두 아다치판 복각 우키요에(画像提供:アダチ伝統木版画技術保存財団) 
#02
1850년 입문

1850년(혹은 1849년), 12세 소년 요네지로(요시토시)는 당대 우키요에의 거장 우타가와 쿠니요시의 문하로 들어갔다.

기록에 따르면 요시토시는 처음에 서정적인 화풍의 ‘사조파(四条派)’ 화가 밑에서 수련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 화풍으로는 팔리지 않는다(시대를 담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쿠니요시를 찾아갔다는 흥미로운 일설이 전해진다.

물론 여기에는 지리적 배경도 한몫했다.
요시토시의 양아버지는 니혼바시의 상인이었고,
쿠니요시의 거처 또한 그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에도의 상인 계층이 이웃한 예술가에게 자녀의 교육을 맡기던 관례를 고려할 때,
요시토시의 입문은 ‘지리적 접근성’이라는 환경 위에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본 소년의 안목’이 더해진 결과였다.

이는 당시의 주류적 흐름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 시절 우키요에계의 압도적인 1인자는 세련된 미인화로 인기를 누리던 우타가와 쿠니사다였다.
허나 요시토시는 거칠고 역동적인 무사화와 서양풍 사생을 실험하던 쿠니요시의 제자가 되기를 택했다.

결과적으로 이 만남은 요시토시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스승 쿠니요시가 남몰래 연구하던 서양화의 정밀함이 요시토시의 천부적인 집요함과 만났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유행을 쫓아 미인화 유파로 갔다면,
훗날 우리가 마주하게 될 독보적인 ‘요시토시 스타일’은 결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853년 발행 ‘구로후네 내항’ 가와라반 (출처: Yahoo! JAPAN News)
#03
1853년 ‘흑선(黑船)’의 등장

요시토시가 ‘이치료사이(一魁斎)’라는 화명을 얻고 화가로서 첫발을 내딛으려던 1853년 15세의 해,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흑선)가 에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사건을 넘어, 당시 화가들에게는 ‘시각적 체계의 붕괴’를 의미하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의 시각화
당시 일본인들이 기록한 ‘쿠로후네-에(흑선화)’를 살펴보면,
돛 없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움직이는 거대한 철제 증기선은 공포와 경이로움의 대상이었다.
특히 흑선에 장착된 대포의 사거리가 에도 도심까지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구의 압도적인 과학 기술은 일본 대중에게 실존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전통적 묘사의 한계 직면
요시토시는 데뷔와 동시에 이러한 문명의 충격을 목격하며,
전통적인 우키요에의 평면적인 필선으로는 이 거대한 실체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직감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에도의 화가들은 흑선의 구조와 페리 제독의 생김새를 사진처럼 정밀하게 기록하려는 강박적인 시도를 보였는데,
요시토시 역시 이 ‘정밀한 기록’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화가로서의 첫 과제로 부여받게 되었다.

서구적 사실주의로의 입문
흑선의 도래 이후 서구의 사진 기술(다게레오타입), 신문, 그리고 해부학적으로 정교한 동판화들이 급격히 유입되었다.
요시토시가 훗날 보여주는 극사실적인 묘사와 광원에 따른 그림자 처리는,
바로 이 시기에 목격한 ‘서구 공학의 정밀함’과 ‘실제와 똑같이 그리려는 사실주의적 열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결국 흑선은 그에게 “기존의 화풍은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시각적 혁명의 시발점이었다.


귀스타브 쿠르베「파도」(1869년)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귀스타브 쿠르베가 거친 파도의 질감을 사진처럼 정밀하게 포착하며 사실주의(Realism)의 문을 열고 있었다.
흑선을 타고 건너온 이러한 서구적 사실주의의 파도는 요시토시에게 ‘전통적 묘사’라는 낡은 외피를 벗어던지게 만드는 강력한 기폭제가 되었다.
#04
서양 사실주의(Realism)의 정점과 마주하다

요시토시가 화업을 시작할 무렵,
지구 반대편 유럽 미술계는 낭만주의가 저물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는 사실주의(Realism)가 태동하고 있었다.

귀스타브 쿠르베, 밀레와 같은 거장들이 인체의 정교한 묘사와 삶의 진실성을 추구하던 시기였으며,
초기 사진 기술인 다게레오타입의 보급으로 ‘실제와 똑같은 이미지’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러한 서구의 사실주의는 흑선과 함께 일본에 상륙했다.
거대한 증기선은 인간이 정교한 공학을 통해 거대한 에너지를 통제하는 산업혁명의 산물이었다.

요시토시는 이 압도적인 ‘정교함’에 주목했다.

그는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서양화의 정밀함이 새로운 시대를 기록할 유일한 도구임을 직감했고, 이를 자신의 그림에 녹여내야 한다는 예술적 압박을 느끼게 된다.


일본 최초의 서양 해부학서 「해체신서(解体新書)」(鳩盧莫斯原著/杉田玄白等訳・大槻玄沢重訂/南寧一模/中伊三郎銅板彫刻)-京都大学附属図書館
#05
3대 기법(원근법, 명암법, 해부학) 수용의 실체

요시토시가 서양의 3대 기법을 수용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추측이 아닌,
명확한 기록과 실천적 행적을 통해 증명된다.

스승의 컬렉션
스승 우타가와 쿠니요시가 네덜란드 동판화와 서양 해부학 서적을 대량으로 수집하여 제자들에게 교재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당시 문하생들의 증언과 문헌(예: <우키요에 화가 전傳>)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요시토시는 스승의 사후 유품 중 상당수를 물려받았는데,
그 안에는 그가 평생 연구의 토대로 삼았던 다수의 서양 화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기법 습득의 통로가 실재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근거다.

‘시신 사생
요시토시의 리얼리즘이 단순히 화보를 보고 유추한 결과가 아님은 그의 행적에서 드러난다.
1868년 우에노 전쟁 직후, 그는 전쟁터로 직접 나가 시신들을 관찰하며 사생했다는 확실한 기록(John Stevenson, Yoshitoshi’s Cruel Prints 등)을 남겼다.
인체의 골격과 근육이 파괴된 모습을 현장에서 직접 기록한 이 지독한 실천은
그의 ‘해부학적 리얼리즘’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된다.

의도적 기법의 적용
명암법이나 원근법의 경우 요시토시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서양 화보들을 독학하며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후기 걸작인 <달의 백태(月百姿)> 등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광원 처리와 그림자 묘사는 전통 우키요에 문법에는 존재하지 않던 개념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요시토시가 서양의 시각 체계를 의도적으로 분석하고 자신의 화풍에 완벽히 통합시킨 결과로 확정하고 있다.




시대의 격변 속에서 태어났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화가로서 완벽한 무기를 갖출 수 있었던 요시토시.
하지만 그에게 펼쳐질 앞날은 안타깝게도 참혹한 현실뿐이었다.

에도의 평화가 완전히 무너지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연마한 칼날을 어디로 겨누었을까?

다음 글에서는 그가 ‘츠키오카 요시토시’로서 공식적인 독립을 선언하게 된 배경과,
사제 요시이쿠와의 잔혹한 대결을 통해 자신만의 독보적인 리얼리즘을 구축하기 시작한 과정에 대해 말해 보려 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