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 Tsukioka Yoshitoshi (月岡芳年)] #03 | 츠키오카 요시토시의 생애 2부 (예술적 독립과 잔혹함의 시작)

[ DATA ARCHIVE ]

Category: Artist / Ukiyo-e (우키요에)

Subject: Tsukioka Yoshitoshi (月岡芳年, 1839-1892)

Index: #03

Status: Record Initialized



1865년부터 1867년까지의 짧은 기간은
츠키오카 요시토시의 생애에서 예술적 자립과 신분적 전환이 동시에 일어난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이번 장에서는 요시토시가 ‘츠키오카’라는 가문의 이름을 짊어지게 된 배경과,
훗날 그를 ‘피의 화가’로 정의하게 만든 잔혹미의 서막을 추적해 본다.


츠키오카 셋사이(月岡雪斎), 18세기 말~19세기 초, LACMA 소장.
요시토시의 양부이자 츠키오카 가문의 맥을 잇던 츠키오카 셋사이의 육필화(肉筆画).

#6
1865년(게이오 1년): ‘츠키오카 요시토시’가 되다

예술적 독립과 화성(画姓) 계승

1865년, 26세의 요시토시는 종조부(할아버지의 동생)인 츠키오카 셋사이(月岡雪斎)의 뒤를 잇기 위해
‘츠키오카(月岡)’ 가문의 양자로 입적하며 독립적인 화가로서의 지위를 얻었다.
양부인 설재는 본래 요시토시와 같은 오와라(大原) 가문 출신이었으나,
오사카의 유서 깊은 화가 가문인 츠키오카 가문의 맥을 잇기 위해 먼저 양자로 입적된 상태였다.

셋사이는 가문을 계승했으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다.
이에 당시 스승 쿠니요시 문하에서 천재성을 인정받던 조카손자 요시토시를
가문의 적통을 이을 인물로 지목했다.
본명이 ‘오와라 요네지로’였던 요시토시는 이를 수용하여
1865년 공식적으로 츠키오카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이 입적을 통해 요시토시는
우타가와(歌川) 유파의 수많은 문하생 중 한 명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났다.
그는 독립적인 화성인 ‘츠키오카’를 독점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는 화단에서 가문의 수장으로서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일본의 ‘가문 제도’에 따른 공식적인 신분 전환이었다.
요시토시는 입적 후 법적, 사회적으로 츠키오카 가문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가문의 제사를 모시고 가풍을 유지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되었으며,
평생 이 성씨를 사용하며 가업을 이어 나갔다.


막부 말기의 ‘공포 정국’과 요시토시의 예술

“왕을 받들고 외세를 몰아내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세력과
기존의 막부 세력이 에도(지금의 도쿄) 거리 곳곳에서 칼부림을 벌였다.
신센구미(新選組) 같은 조직이 활동하며 반대파를 숙청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암살이나 길거리에 방치된 시신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처럼 뉴스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대중은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한 시각적 정보를 갈구했다.

요시토시는 이 참혹한 풍경을 단순히 ‘무서운 그림’으로 소비한 게 아니라,
시대의 진실(Data)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러한 시대적 참상을 단순히 회피하거나 가공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벌어지는 폭력과 인체의 파괴를 관찰하며,
그것을 가장 정교하게 그려낼 수 있는 ‘사실주의적 기법’을 연마했다.


(좌)「和漢百物語 楠多門丸正行」(1865)
훗날 남조의 충신으로 이름을 떨치는 쿠스노키 마사츠라(어린 시절 이름 타몬마루)가 여우 요괴의 정체를 밝혀내며 기개 있게 대치하는 장면이다.
(우)「和漢百物語 土岐大四郎」(1865)
미노국의 무장 토키 다이시로가 괴력으로 요괴(악귀)를 제압하는 전설적인 장면을 묘사했다.

#7
1865년~1866년: ‘츠키오카’로서의 폭발적 다작기
요시토시는 가문을 계승한 1865년 한 해 동안 놀라운 작업량을 보여주었다.
이는 독립한 화가로서의 존재감을 증명해야 했던 그의 절박함과 시대의 요구가 맞물린 결과였다.


경제적 책임과 가문 유지

瀬木慎一(세기 아키오), 『月岡芳年』(츠키오카요시토시), 講談社(고단샤).
요시토시가 츠키오카 가문을 계승하면서 단순한 화가를 넘어
‘가주(家主)’로서 짊어져야 했던 경제적 의무를 상세히 다룬다.
양부 설재가 남긴 가문의 유지비와 사회적 품위 유지비는 당시 요시토시에게 상당한 부담이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출판사(판원)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하며
다작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음을 기재했다.


시장 경쟁과 브랜드 확립

岩切由里子(이와키리 유리), 「月岡芳年の画風変遷에 대하여(月岡芳年の画風変遷について)」
우타가와(歌川)라는 거대 화파에서 독립한 직후,
시장에서 ‘츠키오카’라는 새로운 이름의 상품 가치를 증명해야 했던 전략적 선택을 분석하였다.
논문은 이 시기 요시토시의 작품들이 다양한 주제(요괴, 무사, 풍경 등)에 걸쳐 있는 이유를
‘전방위적 마케팅’의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유년기의 빈곤과 생존 본능

桑原忠男(쿠와바라 타다오), 『月岡芳年の夜話(츠키오카 요시토시의 밤 이야기)』
요시토시의 제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바탕으로 한 이 책에는,
요시토시가 평생 가난에 대해 가졌던 공포와 결벽에 가까운 작업 태도가 묘사되어 있다.
특히 1865년 독립 직후 그가 보여준 집요한 작업량은
이러한 유년기의 결핍에서 온 ‘생존을 위한 예술’이었다고 평론하고있다.


「和漢百物語(화한백물어)」(1865)

츠키오카라는 성을 사용하며 발표한 초기 대표작은 「和漢百物語(화한백물어)」(1865)다.
일본과 중국의 전설, 민담, 귀신 이야기를 다룬 26매의 작품으로,
요시토시 특유의 정교한 묘사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물의 역동적인 동세와 서늘한 분위기 묘사는 단순한 요괴화를 넘어선 긴장감을 전달한다.
학계와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스승 우타가와 쿠니요시의 화풍을 완벽히 소화한 동시에,
요시토시만의 독자적 스타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걸작’으로 평가한다.
구도와 동세에서 화면을 압도하는 대담한 구도와 역동적인 인체 표현은
쿠니요시의 화풍을 충실히 재현했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심리적 묘사에서 쿠니요시가 호쾌한 기개를 강조했다면,
요시토시는 날카로운 선과 세밀한 표현을 통해 인물의 내면적 불안감과 서늘한 긴장감을 부각했다.


그 외 다른 작품

「末広五十三次(수에히로 53차)」(1865)
도카이도의 풍경을 부채꼴 모양 안에 담아낸 연작.
풍경화에서도 그가 구도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勇寿(이사미노 고토부키)」(1865)
씩씩하고 용맹한 인물들을 다룬 작품으로, ‘츠키오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또 다른 축.

「近世侠義伝(근세협의전)」(1865-1866)
당대 협객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역사 속 인물이 아닌 ‘근세’의 인물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英名組討揃(영명조토졸)」(1865-1866)
용맹한 무사들이 서로 맞붙어 싸우는 장면을 포착한 연작.
인체의 뒤틀림과 역동성을 실험하며 훗날 ‘무참에’로 가는 근육 묘사의 기틀을 닦았다.

「美勇水滸伝(미용수호전)」(1866-1867)
수호전의 인물들을 요시토시만의 날카로운 선으로 재해석한 작품.
인물의 미(美)와 용(勇)을 동시에 잡아내며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출처 정보 (참고 문헌)
-단행본: 瀬木慎一(세기 아키오), 『月岡芳年』(츠키오카요시토시), 講談社(고단샤) / 桑原忠男(쿠와바라 타다오), 『月岡芳年の夜話(츠키오카요시토시의 밤 이야기)』
-전시 평론: 太田記念美術館 (오타 기념 미술관) 특별전 해설 기록
-논문: 「月岡芳年筆『和漢百物語』について」 (일본 미술사학 논문집) / 岩切由里子(이와키리 유리), 「月岡芳年の画風変遷에 대하여(月岡芳年の画風変遷について)」


「英名二十八衆句(영명이십팔중구)」 (1866-1867) –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 作

#8
1866~1867년: 잔혹미의 정점과 숙명의 경합

「英名二十八衆句(영명이십팔중구)」 피의 서사시

1866년부터 1867년 사이, 요시토시는 ‘피의 화가’라는 악명과 명성을 동시에 얻게 된다.
그는 사제인 오치아이 요시이쿠(落合芳幾)와 함께
총 28매의 연작인 「英名二十八衆句(영명이십팔중구)」를 기획했다.
두 사람은 각각 14매씩 작품을 나누어 맡았으며,
가부키 극 중 가장 잔혹한 살인과 고문 장면을 소재로 삼았다.

당시 막부 말기의 에도는 실제 유혈 사태가 빈번했던 혼란기였다.
대중은 가상의 틀인 가부키를 빌려온 이 작품에서 실제 사건보다 더 생생한 공포를 목격했다.
요시토시는 「和漢百物語(화한백물어)」에서 보여준 역동성을 넘어,
인체가 훼손되는 순간의 물리적인 리얼리즘을 극대화했다.
피가 분출되는 궤적이나 절단된 피부의 질감을 정교하게 묘사하며
스승 쿠니요시의 화풍을 뛰어넘는 독자적인 노선을 확립했다.


‘잔혹함’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과 시대적 충격

현대인의 눈에는 판화 속 묘사가 다소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1860년대 대중에게 이는 시각적 테러와 같았다.

「단시치 쿠로베(團七九郞兵衛)」로 비교하자면
요시토시 이전에도 이처럼 피가 묘사된 우키요에는 다수 존재했다.
하지만 요시토시의 묘사가 당대 대중에게 더 잔인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단순히 피의 양이 많아서가 아니라, 피를 다루는 ‘질감’과 ‘심리적 깊이’의 차이에 있다.

이전의 우키요에의 피는
주로 붉은색 물감을 평면적으로 칠하거나 손바닥 자국처럼 찍어내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이 인물이 상처를 입었다” 혹은 “살인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상징적 기호에 가까웠다.
피가 옷의 결을 따라 흐르거나 바닥에 고여 깊이감을 형성하는 묘사는 드물었다.

또한 피는 인물의 용맹함이나 비극성을 강조하는 장식적 요소였다.
인물은 온몸에 피를 묻히고도 여전히 영웅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고통보다는 ‘멋’에 치중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団七九郎兵衛(단시치 쿠로베)와 三河屋義平次(미카와야 기헤이지)」(1855) – 우타가와 쿠니사다(歌川国貞) 作


요시토시는 피의 점성과 유동성에 주목했다.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의 궤적(Splatter), 옷감의 섬유 사이로 스며들어 번지는 얼룩,
시간이 지나 검붉게 변색된 핏덩어리 등을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묘사했다.
대중은 이를 보며 그림이 아닌 ‘실제 액체’를 보는 듯한 생리적 혐오감을 느꼈다.

또한 요시토시는 칼에 베이는 순간 근육이 어떻게 뒤틀리는지,
인물이 고통으로 인해 어떤 비참한 표정을 짓는지를 집착적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그림 속 피는 인물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이 아니라,
인물의 생명이 빠져나가는 파괴의 과정 그 자체였다.

기록과 평론에 따르면 요시토시의 작품이 더 잔인하게 느껴졌던 결정적 이유는
‘서늘한 관찰자의 시선’ 때문이다.

「英名二十八衆句 団七九郎兵衛(영명이십팔중구 단시치 쿠로베)」(1867) –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 作

연극적 재구성과 해부학적 관찰: 요시이쿠와 요시토시

「英名二十八衆句(영명이십팔중구)」를 함께 제작한 요시이쿠와도 대비가 되었다.
두 화가는 경쟁하듯 자극적인 묘사를 추구했으나, 그 결은 판이하게 달랐다.

함께 경합한 요시이쿠는
가부키의 연출처럼 피를 화려하게 뿌려선정적인 장식적 잔인함에 치중했다.

이는 대중의 말초적인 재미를 자극했다.
관객이 ‘이것은 허구다’라고 인지할 수 있는 안전거리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英名二十八衆句(영명이십팔중구)」 (1866-1867) – 오치아이 요시이쿠(落합芳幾) 作


반면 요시토시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는 장면을 부검하듯 차갑게 묘사했다.

이와키리 유리(岩切由里子) 등의 연구자는 요시토시가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배제하고
‘생물학적 진실’에 다가갔기 때문에 대중이 압도적인 공포를 느꼈다고 분석한다.

그는 인물이 죽어가는 순간의 생리적인 공포와 해부학적 구조에 집착하여
인물의 비명과 뒤틀린 신체를 통해 단순한 공포를 넘어선 실존적인 압박감을 전달했다.

따라서 단순히 피가 묻어있다는 사실을 넘어,
그 피가 어떻게 흐르고 고이며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물리적으로 증명하려 했던 태도가
요시토시를 ‘무참에(잔혹화)’의 독보적인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다.

「英名二十八衆句(영명이십팔중구)」 (1866-1867) –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 作





요시토시가 보여준 유혈의 기록은 아직 서막에 불과했다.
가공된 허구 속에서 리얼리즘의 극단을 실험하던 요시토시의 붓은
이제 곧 실제 전쟁터의 참상이라는 거대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음 장에서는 요시토시의 예술적 도약과 동시에 정신적 붕괴의 서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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